본문 바로가기

세상톺아보기-칼럼

<아침을 열며...> 표절의 정치

2004-03-31
총선을 앞두고 며칠 사이에 펼쳐지고 있는 정치권의 '따라하기'를 보면 언젠가 곁눈질로 읽었던 인상적인 시구가 문득 떠오른다. "하늘을 표절한 땅/낮을 표절한 밤의 송사/우리는 긴긴 어둠을 서로의 살 속에 말아 넣는다./그것들은 저희끼리 얽혀 가다가/우리 온 정신의 성감에서 만난다/끈과 단추는 모두 풀어 헤치고/우리는 서로를 표절한다./다만 기쁘도록/다만 어울리도록/그런 아침과 밤을 만나게 하는 까닭,/그것을 표절하는 남자와 여자,/자연과 인간은 표절투성이다/태초, 하늘이 나를 표절하듯/신이 나를 표절하듯."'표절'이라는 낱말이 일곱번이나 나오는 이규호(李閨豪)의 시 '만나게 하는 까닭'은 은근한 사랑을 그리면서 인간사를 표절의 역사로 묘파하는 절창이다.

기자는 요동치는 탄핵정국 속에서 몇몇 정당들이 뾰족한 묘안을 찾지 못한 채 흉내내기 선거운동에 급급한 모습을 '표절의 정치'로 불러보겠다. 열린우리당이 불법자금으로 호화당사를 얻었다는 비난이 일어난 즉시 '스핀닥터' 처방을 동원해 한달음에 낡아빠진 농협 공판장으로 당사를 옮기자, 한나라당은 한술 더 떠 한강변에 천막당사를 만든 데서 총선전략 표절의 서막이 오른다. 박근혜 한나라당 새 대표가 택시 출근 이벤트로 멍군을 부르자,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은 자신은 물론 주요 중앙당 간부들에게 택시 출근을 요청하는 문자메시지를 보내 베껴먹기로 응수한다. 내분을 겪던 민주당의 추미애 선거대책위원장은 뒤질세라 아예 택시회사로 찾아갔다. 마치 슬갑도적(膝甲盜賊) 같다. 점입가경이라는 표현을 능가하는 말이 없을 듯하다.

선거운동 베끼기에 급급
택시가 표절정치의 중심에 선 까닭에는 경제 챙기기 외에도 '여론 전파의 첨병'이라는 상징성이 자리잡고 있는 게 분명하다. 정의장의 남대문시장 방문을 그대로 모방한 박대표의 뇌리에는 '민생경제의 최전방'과 방송매체의 놓칠 수 없는 그림이 떠올랐을 법하다. 점입가경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열린우리당이 노란 점퍼로 표상하자 한나라당은 뒤늦게 운동화로 대응한다. 결코 권장할 일이 아닌 이벤트와 이미지 정치에서도 차별성보다 정치적 상상력의 빈곤이 백일하에 드러나는 씁쓸한 풍경이다.

이런 추세라면 앞으로 또 어떤 베껴먹기 이벤트가 등장할지는 예단을 불허한다. 예술작품에서 논문, 방송프로그램, 온갖 상품에 이르기까지 '표절공화국'으로 일컬어지는 풍토에서 이 정도쯤이야 애교로 봐줘야만 할까. 서로 욕하며 따라하기는 더 없는 꼴불견 같다. 우리나라처럼 따라하기 신드롬이 강한 나라도 없으니 정치권만 고고하게 남으라고 주문하는 게 무리일지 모른다.

사실 표절정치에 대한 경고는 중국 '효빈(效嚬)의 고사'에도 등장할 만큼 오랜 나이테가 엄존한다. 널리 알려져 있는 미인 서시(西施)의 찡그린 얼굴 흉내내기 이야기는 바로 정치권을 향한 화살이었다. 춘추시대 말엽의 난세에 태어난 공자가 옛날 주왕조의 이상정치를 그대로 노나라와 위나라에 재현하려 하는 것은 마치 추녀가 서시를 무작정 흉내내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장자가 빈정댄 것이다. 물론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이벤트 정치와는 차원이 달라도 한참 다르다.

창조성 함께 벤치마킹을
과거의 검은 돈 먹기와 정책의 표절에서, 이벤트 베끼기로 무게중심만 넘어가는 정치는 개혁과 거리가 멀다. 벤치마킹도 창조성이 곁들여지지 않으면 효험이 반감되는 법이다. 무차별 폭로와 비방 같은 부정적인 선거운동 방법을 버리고 거듭나려는 길목에서 장점을 경쟁적으로 따라 배우는 것이라면 마냥 비난할 일은 아니다. 좋은 일 따라하기라면 차라리 감동적이다. 하지만 나아가기보다 따라하기에 급급하다면 생산성은 난망이다. 우린 언제쯤 생산성과 차별성이 함께 하는 선거운동 풍경을 기대해볼 수 있을까.

김학순 본사 신문발전연구소장